감각을 일깨워내려는 듯 귓등을 때리는 알람 소리에 결국 눈을 떴다. 해가 일찍 떠서 밝을 만도 한데 새벽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인지 평소보다 어두웠다.
조금만 더... 겨우 알람을 끄고선 오분이라도 좀 더 누워있고 싶어서 눈을 다시 감았다. 감은 눈 너머로 옆방 동기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범신도 이젠 일어나야만 했으나 지난밤 자신의 체온으로 겨우 덥힌 이불이 못내 아쉬웠다. 이것저것 갈등하다 결국 가만히 있기가 좀이 쑤셔 조금 움직이자 등 뒤로 덮은 이불 사이 작은 틈새가 생겼다. 그러자 그 틈으로 얇은 벽에서 새어 나온 찬 바람이 점점 이불 속 온기를 뺏어가기 시작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계시구나. 범신은 괜히 한번 더 꿈지럭 거리고는 결국은 이불을 걷어냈다. 이불을 걷자마자 차원이 다른 추위가 몸을 감싸는 기분에 한기를 털어내듯 몸을 한번 떨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겉옷을 챙겨 입고 씻기 위해 복도로 나섰다.

 일단 씻고 나니 나갈 준비는 금방 끝났다. 이불에서 늑장을 부린 탓에 미사 시간에는 조금 늦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짧은 머리를 한 번 더 탈탈 털었다. 이정도면 됐겠지. 이제 방문만 닫고 성당에 가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차가운 문고리가 손에 닿자 아무래도 이대로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멈춰섰다.
따뜻한 무언가를 가져가야겠는데 뭐가 있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범신은 예전에 옆집에 살던 영신이가 준 핫팩이 생각났다. 영신이 주는 것이기에 마지못해 받았지만 건장한 24살의 남자가 들고 다니기에는 민망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어 책상 서랍에 그냥 넣어 둔 것이었는데. 범신은 바로 몸을 돌려 책상 맨 위쪽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살풍경한 서랍 속에서 귀여운 핫팩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핫팩을 집어 들고는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가져가야할까?
 잠시동안 고민하던 범신은 결국 뚱한 표정으로 한 손에 핫팩을 들고 기숙사를 나왔다.


 범신은 어릴 적부터 목이 약해서 추운 날씨를 특히 조심해야 했다. 딱 지금 날씨에 까딱하다간 크게 몸살이 날 것만 같았다. 크게 한숨 들이쉬자 바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폐가 어는 느낌이 들었다. 아찔해진 범신은 숨을 멈추고는 차가워진 폐를 녹이려 괜히 나오지도 않는 침을 삼켰다.
핫팩만 생각했지 목도리까지 챙길 생각은 하지 못한 자신이 괜히 원망스러워졌다. 적어도 어제 자기 전 나갈 준비를 할 때, 겉옷과 함께 목도리를 옷걸이에 걸어두기라도 했으면 오늘 아침 하고 왔을 터였다. 왜 하필 그 생각을 못하고 목도리를 옷장 안에 고이 접어 두었는지. 그러나 지금 와서 기숙사에 갔다 오기엔 너무 늦었기에 후회가 서려있는 숨을 내뱉었다. 입김은 하얗게 얼고는 금방 공기 중에 부서졌다.
적어도 건물 안은 따뜻할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거리였기에 범신은 얼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 때 뒷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님, 지금 가시는 겁니까? 같이 가시죠."

평소에도 뺀질거리는 그 모습이 얄미워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었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마주치게 되는 것은 예상외였다. 이 사람이 항상 이 시간에 나오는 줄 몰랐는데, 이렇게 만나게 줄이야. 뒤에서 말을 건 사내는 어느새 범신 바로 옆에 서서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예..뭐. 어쩌다 보니 지금 가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원래 이 시간에 가시는 겁니까?”
 “네. 지금 가도 늦지 않아서 지금 시간에 가게 되더군요. 원래 이렇게 추운 날엔 조금 더 이불에 있고 싶어지잖아요.”

 자신을 따라잡기 위해서 급하게 왔는지 대답 하는 목소리는 약간 숨이 찬 듯 했다. 범신에게 말을 건 목소리의 주인은 준호였다.
 준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교적이었다. 지금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거의 아웃사이더로 대학 생활을 보내는 범신이 혼자 가는 것을 보면 보통 다른 동기들은 못 본 척 지나갔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급하게 와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친절함이 몸에 밴 듯하였다. 그리고 그 친절함은 꽤 반반하게 생긴 외모가 함께 하여, 그를 ‘만나면 반가운 사람’ 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보다, 형제님 춥지 않으십니까? 이 추운날씨에 그렇게만 입고 나오시다니.”
 “늦어서 그랬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지금 떨고 계시는데요?”

 하지만 친절함이 누구에게나 반가운 것은 아니다. 부러 동기들과 거리를 두는 범신에겐 준호의 그 친절함이 부담을 넘어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몇몇 동기들이 보이긴 했지만 준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면 혼자서만 툭 삐져나올 정도로 키가 큰 사내를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 사내는 범신이 나온 후에 나왔다는 거였다. 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부터 급히 걸어와 말을 거는 일은 번거로웠을텐데, 왜 이런 행동을 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누가 봐도 추울 것 같은 복장으로 나온 자신에게 춥지 않냐고, 그걸 또 일일이 물어보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지기엔 춥기도 했고, 더 이상 말 할 기운도 나지 않아 범신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추운데 조용히 제 갈 길이나 갑시다. 예?’

 슬쩍 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범신은 걸음을 재촉했다. 앞으로는 춥다고 이불에서 늑장 부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핫팩을 꼭 쥐었다. 그나마 손은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당연히 춥지 않겠냐며 준호의 멱살을 잡고 흔들 뻔 했다. 그냥 이제 무시하며 가자고 다짐하는데 내리는 눈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저 너머로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갑자기 시작된 짜증과 어색함은 금방 끝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에이, 형제님도 참 아침부터 쌀쌀하십니다. 역시 추워서 그런가.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나 준호는 범신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신의 어깨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늦을 텐데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내려던 범신은 다가오는 손에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어느새 자기가 하고 있던 남색 털목도리를 벗어 손에 들은 준호가 목도리를 한바퀴, 두 바퀴. 참 꼼꼼하게도 범신의 목에 매줬다. 어릴 적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던 것이 생각났다. 범신아, 사람은 목만 따뜻해도 춥지 않은 것이야. 그걸 증명하듯 목 부근이 따뜻해지자 어느새 몸의 떨림도 멈춰있었다.
 준호는 어느새 야무지게 다 두르고선 목도리 끝도 사이사이에 꽂아 넣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형제님 추위 잘 타시잖습니까. 딱 봐도 겉옷만 입어서 추우신듯한데 목도리, 전 괜찮으니 형제님 빌려드리겠습니다. 늦겠습니다. 얼른 가죠.”

 입꼬리를 끌어 올려서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주고 등을 미는 그의 행동에 앞으로 몸이 나갔다. 확실히 아까 전보다 따뜻했다. 목도리에선 남학생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런데 내가 추위를 잘 타는건 어떻게 알고? 여러가지로 어이가 없어진 범신은 고맙다는 말도 잊고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둘은 성당에 도착했다. 그렇게 많이 늦은 것은 아니었는지 안은 꽤 소란스러웠다. 형제님 자리는 저쪽이시지요. 그럼 조금 있다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묻혀서 뒤에 계속된 준호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조금있다 돌려달라는 말이었을것이다. 아 예, 그럼 조금 있다 뵙죠... 꾸벅, 목인사를 하며 대충 대답하고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성당은 역시 따뜻했고, 얼었던 몸은 녹기 시작했다. 그러자 둘러진 털목도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뒤늦게 해야 할 말이 생각난 범신은 고개를 들고 저 뒤로 준호가 앉아있는 쪽을 바라봤다. 사교성 좋은 인기인답게 동기들과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뚫고 가서 이야기하는건 범신에겐 버거웠다. 저, 이거 고마웠다. 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에게 쏠릴 시선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또한 고맙다는 말은 조금 있다 목도리를 돌려주면서 해도 되는 말이었다. 결국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하며 범신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제 목도리를 더 하고 있다간 땀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왠지 모를 아쉬움에 범신은 목도리를 차마 벗지 못했다. 범신의 손이 목도리를 풀려다 자꾸만 허공에서 멈췄다. 범신의 머릿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던 큰 손이 자꾸만 생각났다.
 앞을 쳐다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아침 기도가 시작되려는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범신은 자꾸만 생각나는 여러가지 것들을 억지로 한 구석에 밀어넣고는 결국 목도리를 벗었다. 벗자마자 약간의 한기가 돌았는데 그 덕에 막 시작하는 기도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범신은 십자 성호를 그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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